고난에 찬 삶속에 藝道 정진했던 조각가 故 文信씨
(서울=聯合) 24일 새벽 73세를 일기로 타계한 文信씨는 좌우 대칭의 균형미가 강조된 특유의 조형세계로 명성을 떨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로 조각가였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난 文씨는 온갖 역경을 딛고 예술가로 우뚝 선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했다. 어릴적부터 손재주가 뛰어나 주위를 놀라게 했던 그는 16살 되던해 미술공부를 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구두닦이, 극장포스터 붙이기, 산부인과 조수, 영화사 잡일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하며 미술수업을 쌓았다.
東京의 일본 미술학교 양화과를 수료하고 해방과 함께 7년여만에 귀국해 60년대초까지 마산, 부산, 서울등지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10여차례 개인전도 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화가수업을 받기위해 61년 빈털터리로 감행한 파리행은 그의 예술행로를 바꾸어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학비도 벌고 생계유지도 할겸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古城修飾작업을 통해 그는 조각세계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됐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댕이 갖가지 노동에 종사함으로써 조각가로서의 기량을 닦았듯이 그도 4년여동안 석공, 목수, 미장이 노릇을 하고 두 성탑의 지붕까지 손질하면서 조각의 탄탄한 기초를 다지게 됐다.
文씨는 `세느강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절망과 싸우던 시절이었지만 당시의 작업이 조각가로 성장하는데 바탕이 됐다"고 회상하곤 했다.
65년 일시 귀국, 홍익대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던 그는 2년후 다시 파리로 돌아가 80년 영구 귀국할때까지 파리, 독일 함부르크, 이탈리아등지에서 지속적인 개인전과 살롱전, 그룹전에 참가하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였다.
57세 되던해 스물네살 연하의 한국화가 崔星淑씨와 결혼하고 이듬해 국내에 정착한 그는 고향 마산에 미술관을 짓는 사업에 매달렸다. 그가 말년에 가장 애정을 쏟은 미술관사업은 그러나 미술관 바로 앞에 13m의 높은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게돼 그를 좌절케 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1점의 미술관 소장품이 도난당해 그를 정신적으로 몹시 힘들게했다.
지난 4월 경남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은 文씨는 자신이 위암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미술관은 마산시민과 민족전체의 문화적 자산"이라며 미술관을 훼손없이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재단법인 문신미술관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작품과 운영전반을 부인 崔씨에게 위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출 처 : 연합뉴스 1995.05.24.]
[링 크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3967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