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중세
1895년 창원시 상남동 출생
1919년 4.3 진전면 독립만세운동 주도
1919년 일본 경찰을 피해
중국 길림성으로 피신
그리고...
1919년 11월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 . 열 . 단 결성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배중세와 뜻을 함께 한
단장 김원봉과 의열단 단원들
부산 경찰서 폭파
밀양 경찰서 습격
총독부 습격
동양 척식 주식회사 폭파
일제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의열단 배중세
1920년 징역 2년 복역
1925년 징역 3년 복역
1943년 세 번째 투옥
그리고 ...
1944년 1월 23일
해방 된 조국을 보지 못한 채
감옥에서 순국
남재우 교수 (창원대학교 사학과) 인터뷰
NA)
“배정세도 배중세의 아우였지만 형 만큼이나
커다란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해방 후) 주민들의 요구에 의해서 건국준비위원회
창원군 상남면 지부 위윈장이 되었고 일본 군대는 배정세가 배중세의 아우임을 알고
죽이려 했던 거죠.”
* 상남면: 창원시 성산구와 의창구 일부의 옛 지명
재판장
NA)
“왜 배정세를 죽였는가?”
일본인들 증언
NA)
“상남면 배가는 반일민족운동의 거두였기에 거류 일본인의 재산 보호와 철수에 위협을 느껴 그렇게 한 것이다.”
* 상남면: 창원시 성산구와 의창구 일부의 옛 지명
일본인이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
우리에겐 창원사람
배중세 배정세 형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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