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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회기획전(7080마산의문학동안자료전) 열림식

등록일 :
2020-03-06 01:14:17
작성자 :
문화예술과(055-225-7193)
조회수 :
114

마산문학관 44회 특별기획전  7080 마산문의 문학동인 자료전

마산문학관 44회 특별기획전 7080 마산문의 문학동인 자료전

[사진 해설]

마산문학관 제44회 특별기획전 <7080 마산의 문학동인 자료전>이 2019년 11월 9일(토)부터 열렸습니다.
예향의 도시 마산은 백치동인 시대인 50~60년대를 거쳐서 70,80년대부터는 새로운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교생 동인 <사향>, 대학생 동인 <갯벌>, 노동자 동인<갯물>은 그 시기 우리 지역 문학을 대표하는 문학동인이었습니다.

그 당시를 회고하는 특별기획전 자료집 [나의 동인시대]에는 당시의 뜨거웠던 문학적 열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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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동인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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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향동인 / 김명희]

윤슬과 사향 / 김명희(시인)

속수무책으로 가을이 깊었다. 우리가 나이들 듯.....
벌써 40년도 더 전의 일이니 내 기억으로 얼마만큼 지난 일을 불러올 수 있을까.  추억이면 좋겠는데 왜곡이면 곤란하다.  
마산의 고교 문예반 학생들의 만남의 통로는 백일장이었다. 봄에는 군항제, 가을이면 개천예술제, 경남학생종합학예회, 한글날, 마산교육대학, 경남대학 등의 백일장에서 늘 보던 얼굴들과 마주치곤 했다. 
졸업을 앞 둔 어느 날, 누가 연락했는지 모르지만 나를 비롯해 강신형, 강숙련, 박영주, 우무석, 유영국, 이종찬, 임정애 등이 모였다. 고등학생 신분이니 다방에 가지도 못하고 주로 중국집에서 모였던 것 같다. 남성동 성당 뒷골목 대각선으로 있던 쌍흥관과 경화관이 주 무대였다. 거기서 합평회를 하고 고량주에 단무지를 춘장에 찍으며 짜장면을 먹었다. 
나라를 구하는 일도 아닌데 하나의 안건을 놓고 대립이 심했다. 동인 이름을 정할 때 ‘윤슬’과 ‘가람’을 두고 우무석과 강신형의 팽팽한 대립 끝에 ‘윤슬’이 탄생했다. 난산이었다. 어렵사리 태어난 윤슬도 쉬이 사라졌다. 월초 선생의 뜻에 따라 사향이 된 것이다. 나는 빛나는 윤슬도 좋았고, 노래의 향기도 좋았다.
첫 동인지를 만들었다. 우무석의 부친이 근무하셨던 교도소 인쇄부에서 찍었다. 모두 가난한 집안의 학생이었으니 주머니 사정은 누구랄 것도 없이 뻔했다. 그나마 우리 중에는 우무석의 부친이 젊으셨으며 큰아들의 든든한 지원군이셨다. 문학이라는 열정이 단벌머리 까까머리들을 모이게 했다니 요즘으로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열아홉, 스무 살에는 유독 고민이 많은 때였다. 특히 나는 직장과 학업의 기로에서 들끓었던 번민을 문학의 이름에 기댔는지 모른다. 이제 그것이 영원한 도피처이자 삶이 됐지만, 그때만큼의 순수는 나 스스로도 보장할 수 없다.
 모두들 가까이 또는 멀리서 소식이 들리는데 아직 커다란 눈의 임정애만은 감감무소식이다.


[사향동인/원은희]

사향나무 가지마다 아린 꿈은 피고 있을까  /  원은희(시인)

사향가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십대를 건너 이십대가 되면서 우리는 젊음과 낭만과 호기롭던 꿈보다 울분과 분노와 절망으로 점철된 암울한 시기를 노래 불렀다. 사향문학의 밤, 사향인의 밤 등의 행사 때마다 결연한 의지를 다지듯 늘 사향가를 합창했다. 내가 글을 쓰고 윤병철 작곡가의 곡을 붙였다. 윤병철은 당시 작곡 공부를 하던 음악도였다. 『사향』2호에 사향가가 실려 있다. 
우리 동이들은 김지하 시집을 비롯한 금서들을 몰래 복사해 읽고 문학의 밤 자료집 작품들을 검열 받으며 문학판을 벌여놓고는 전위문학 운운하며 관객모독이라는 형식을 빌어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이렇듯 문학은 삶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절름발이거나 벙어리, 귀머거리가 된 채 무슨 일 좀 있어라, 있어라’ 주문을 걸 듯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1979년이었다. 
그날은 이학다방에서 모임이 있었다. 거금(내겐 큰 돈)을 들여 벼르고 벼르다 산 구두를 신고 나갔다가 몇몇 회원들과 데모대열에 합류했었다. 구호를 외치며 전진하다보니 어느새 앞줄에 서게 되었는데 최루탄이 터지고 경찰 진압이 시작되었다. 함께했던 여자 회원들과 경찰에 쫓겼다. 결국 부림시장 골목을 돌아 친구 최미애집에서 하룻밤을 구걸하기도 했다. 그날 나는 구두 한 짝을 잃었다. 다음날, 그런 딸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내 책들은 불살라졌다. 
그래도 그 시절 우리 곁엔 월초 정진업 선생이 계셨다. 새해엔 정종 한 병을 들고 문안 인사를 가기도 했었다. 사향이라는 동인 이름도 지어주셨고 창간호의 서문과 제집 제호와 서시 ‘향나무 숲속에 앉아’도 써주셨다.
이선관 시인과는 호형호제하며 격의 없이 지냈으며 우리의 행사에 늘 함께 해줬다. 창간호의 축시 ‘씨앗의 세계’를 써줬고 행사 때마다 시로써 우리를 격려해줬다. 우리가 불쑥 집에 찾아가면 집밥을 먹여주기도 했었다. 기름 동동 떠있던 맑은 닭발탕을 처음으로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행사와 출판물은 경찰의 검열과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자료집에 실을 작품들을 살펴보던 검열관이 이선관 시는 불손한 냄새가 난다며 브레이크를 걸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 부분을 고치기로 서약한 뒤 도장을 찍었다. 물론 돌아와서는 원문대로 발표했다. 아직도 그때 내가 찍었던 붉은 도장밥과 누런 검열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정시운 시조시인도 늘 우리들의 후원자가 돼주었다. 근무지인 고성군 회화중학교에도 자주 갔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선생은 문학을 위해 학교 서무실(행정실)장직을 버렸다. 대단한 결의가 느껴져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문학을 호구책으로 삼는 무모함이 내심 염려되기도 했었다. 어찌되었건 선생이 운영했던 카페 ‘날개’에도 들락거렸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선생은 날개를 날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는데 지금도 소식을 알 바 없다.  
내가 문학의 길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은 고교시절 때부터다. 입학하자마자 백일장이 열렸는데 멋모르고 써낸 시가 입상을 하게 되어 문예반 활동을 하기 되었다. 당시 학교에는 박평주 시조시인이 계셨다. 수업을 받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시조문학』을 구독해서 보라고 권유했고, 자연스럽게 당대의 시조와 접하게 되었다. 나를 시조의 길로 이끌어준 셈이다. 
문예반 회원 몇몇은 백일장이 있는 곳마다 학교를 대표하여 나갔다.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되고 낯선 풍경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수상의 기회들도 따라주었고 다른 학교 백일장 참가자들과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졸업 후, 사향동인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동인들은 문학기행도 자주 다녔다. 을숙도의 갈대밭은 우리들의 키를 훌쩍 넘어 갈대 사잇길로 들어서면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갈대밭에 드러누워 불 지르고 싶다던 설주환은 작품발표는 하지 않고 우리들의 난상토론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고만 했었다.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2대 회장을 맡아 동인지 <사향> 3호를 출간하였다. 회원은 8명이었으나 작품을 실은 회원은 김승강, 박동점, 우무석, 원은희, 유영국, 한영욱, 최미애 등이다.
문학이라는 카테고리로 만나 공부하고 서로 작품을 나눠읽으며 동인으로서의 연대를 형성하게 해주었던 ‘이학다방’은 사향동인의 아지트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 문학을 통한 연대감을 키워갔었다. 당시에는 문학, 연극, 음악을 하는 젊은이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었다. 이제는 성악가로, 지휘자로, 연극인으로 자신을 우뚝 세운 모습으로 가끔 만날 기회가 있으니 세월은 그냥 비켜가지만은 않은 듯하다.
79년 암울했던 와중에 나는 MBC대학가요제에 참가할 곡의 작사 청탁을 받았었다. 당시 어울렸던 경남대학교 음대생이었던 남기제의 요청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리하여 <고운님>이라는 곡이 경남대학 음대생으로 구성된 ‘뮤지케’에 의해 전국으로 중계되었다. 경남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은상이었다. 그날은 홍수로 마산이 온통 물난리를 겪었다. 집들이 잠기고 가축들이 둥둥 떠내려가고 도심이 아수라장이 된 날이었다. 그때 받은 상금은 수해의연금으로 모두 기탁했다.
사향동인회 회장을 맡았지만 군 입대와 삶의 진로 등의 고민을 안고 각각 흩어졌다. 그 뒤 사향의 부재를 잊기라도 하듯 결혼을 했지만 늘 사향을 끌어안지 못한 부채감이 아직 남아있다. 강현덕은 시조계에 큰 족적을 남기며 왕성한 활동 중이고, 최미애는 아동문학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잘 펼치며 끝없이 창작에 매진하고 있으며, 조영안은 수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일근은 한국 시단에 입지적 위치를 점하고 있고, 김승강은 꾸준히 시집을 내며 문단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김숙영은 울산서 방송작가로 활약하다 찻집을 운영하느라 문단에서 볼 수는 없다. 한영욱과 이재업 또한 문단에서 소식을 접할 수 없어 아쉽다. 뒤이어 들어왔던 박동점 또한 문학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 같다.
내 이십대는 사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니 글의 향기를 쫓아 사향동인들과 함께 내달았던 날들이 봄날이었다. 40년의 세월이 지난 나의 육십대는 어떨까? 멈칫 가슴을 쓸어내리자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사향나무 가지마다 피우고자 했던 아린 꿈은 잘 영글어가고 있긴 한 건지. 내가 세우고자 했던 세계질서는 제대로 완성되고 있는지 등등.  



[갯물동인/성선경]

내 즐거운 청춘(靑春)의 한 때 /  성선경(시인, 갯물동인)

 1981년 2월, 내가 마산 땅에 발을 붙였을 때 나는 장에 나온 촌닭이었다. 고향을 떠나 생활하는 것도 처음, 자취도 처음, 내 방을 가진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어리둥절한 대학생활, 그때 소심한 내 행동반경은 대외동에서 월영동까지가 전부였다. 이런 내가 차츰 행동반경을 넓히게 된 게 갯물동인에 들고 부터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촌닭이었고, 어리숙하기는 지금도 그때랑 비슷하다. 그때 함께 동인을 하던 성창경 형을 비롯하여 김종근 형, 한 학년 위였던 강일효, 이용우와 동급생이던 김창하 등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전부였다. 그들 외엔 별 만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밥을 먹을 때도 혼자, 영화를 보러갈 때도 혼자였다. 그때 내 별명은 ‘동전을 줍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늘 땅만 보고 걸었다. 모든 게 낯설고 어눌했다.  
 그 시절 내가 문학에 눈을 뜰 수 있게 한 또 하나의 모임이 ‘살어리’였다. 통신문학 모임이던 ‘살어리’에 들고부터 나는 차츰 마산생활에도 익숙해질 수 있었다. ‘살어리’에는 지금도 자주 만나는 이월춘 형, 이달균 형이 있었다. 나의 마산 생활은 이 두 동인(同人) 활동이 중심이었다.
 ‘갯물’ 동인은 노인정 앞에서 축제기간이면 시화전(詩畫展)도 하고 동인지(同人誌)도 간행했다. 그때의 기억을 생각하면 지금도 신이 난다. 내가 ‘갯물’ 동인(同人)을 생각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두 가지의 사건이 있다. 그중 하나는 여름방학을 맞아 갖게 된 ‘강변시인학교’였다. 
 ‘강변시인학교’는 하동의 섬진강 송림(松林)숲에서 실시되었다. 젊은 혈기에 엄청난 기대를 하고 강변에 텐트를 치고 코펠에 밥을 짓고 자리를 폈다. 우리는 들떠 있었고 마냥 신이 나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주변에 물어보니 강(江)에 초등학생이 빠졌단다. 어디서 많은 낚시꾼들이 몰려와 릴낚시를 강 가운데를 향해 던졌다 거두기를 수십 번 마침내 낚시 바늘에 아이가 걸려 올라 왔다는 것이다. 참 슬픈 기억이다.
 나는 그날 노파의 울음소리를 잊지 못한다. 방학을 맞은 외손자가 보고 싶다고 딸에게 전화를 해 외가댁에 놀러온 아이라는 것이다. 노파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밤새 울었다. 강변시인학교에 참가한 우리들도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해 수십 년 후 경북 달성의 사문진 나루터에 있는 왕버들을 보고 이런 시를 썼다.
 
“물가에 어린애를 내 논 엄마가 울고 있다/산발한 머리 쥐어뜯으며 엄마가 울고 있다/아이야 어디 갔니?/아이야 어디 갔니?/물에 비친 제 그림자를 붙들고/산발한 머리 엄마가 울고 있다/내 아이!/내 아이!/어린애를 물가에 내 논 엄마가 /밤낮없이 머리를 풀고 울고 있다//쇠절구처럼 무거운 마음 /얼마나 벼루여야 바늘처럼 날카로워지나?/바늘처럼 귀를 가지게 되나?”            - 시, 능수버들

 또 하나의 기억은 동인지를 만들기 위한 준비였다. 전국에 흩어진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원고를 받았다. 그때 강일효 동인과 이용우 동인 그리고 나, 이 세 사람이 부산에서 출발하여 영주를 거쳐 강릉까지 갔다. 다시 서울로 들어갔다.
 그때 서울에는 갓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윤종혁(고방) 선배가 계셨고,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한 김종근 형이 계셨다. 그때 목우회 사무실에 근무하던 김종근 형과 만난 우리는 점심을 같이 먹고 수유리에 사시던 윤고방 형 댁으로 함께 찾아갔다. 윤고방 형께서 맛있는 저녁과 함께 술대접을 받았다. 함께 시(詩)를 이야기하고 형의 등단작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그날 윤고방 형께서는 박재삼 선생님과 자주 만난다는 말씀을 하셨다. 다음날 우리는 수유리 4.19 기념탑을 둘러보고 대전으로 내려와서 계룡산을 등반했다. 계룡산 등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동학사를 거쳐 갑사로 가는 길을 택했다. 그런데 갑사에 도착하니 거기는 공주였다. 대전으로 오는 버스비가 모자란 우리는 다시 갑사에서 동학사로 다시 계룡산을 넘었다. 이런저런 고충을 겪은 후에 대전에는 밤이 깊어 도착했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역전에서 서성거리다 그 다음날 첫차를 타고 마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달 후 갯물 4집이 나왔다.
참 거창한 이야기 같지만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은 불과 일 년 반 동안의 이야기다. 나는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 입대를 하였고 내가 제대를 한 후에는 갯물 동인도, 살어리 동인도 다 흩어지고 없어졌다. 물론 내 갯물 후배 중에는 시집 『늦게 온 소포』의 고두현 시인과 시집 『멍게』의 성윤석 시인과 시집 『사랑의 물리학』의 김인육 시인, 시집 『꽃피는 게』의 송창우 시인 등 훌륭한 후배들이 있었지만 내가 복학을 하였을 때엔 이들은 다 군(軍)에 입대를 하여 군 복무 중이었다.
나는 복학을 하고나서 다시 혼자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살어리’ 동인의 형들도 다 취직을 하고 뿔뿔이 흩어져 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참 황망한 일이었다. 그때 유행하던 유머 중 하나가 ‘바늘 하나로 코끼리를 죽이는 세 가지 방법’ 이었다. 첫째 방법은 바늘로 코끼리를 찌른 다음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 둘째 방법은 바늘로 코끼리가 죽을 때까지 찌른다. 셋째 방법은 코끼리가 죽어갈 때 바늘로 찌른다는 것이었다. 그 어느 방법이던 이 유머는 내 문학에 대한 무식한 대응방법이기도 했다. 바늘 하나로 문학(文學)이라는 거대한 코끼리 앞에 선 꼴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문청(文靑)들과 어울리며 시(詩)를 꾸준히 썼다. 1986년 12월 나는 신춘문예(新春文藝) 세 곳을 응모했다. 1987년 신춘문예 세 곳 중에서 두 곳이 최종심에 올랐다. 하나는 중앙지인 중앙일보였고, 하나는 지방지인 경남신문이었다. 나는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시를 더 열심히 썼다. 그 다음해 나는 드디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최종 당선을 하였다. 나는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지 꼭 10년만에 드디어 시인이 되었다. 나의 이런 문학적 경로를 확실하게 그어준 것은 ‘갯물 동인’ 과 ‘살어리 동인’ 활동이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행로(行路)가 막막하거나 답답할 때면 내 삶의 가장 열심이었던 그때를 떠올린다. 활자화(活字化) 되기는커녕 누구도 읽어주는 사람도 없는 시를 쓰면서도 알 수 없는 희열감에 휩싸이던 그때를 생각한다. 변변한 문학잡지 한 권도 구하기가 힘들던 때였다. 바늘 하나로 문학이라는 거대한 코끼리와 마주하던 그 시간을 생각한다. 
이백 원짜리 막국수를 즐겨 먹었고 내 생활비의 대부분을 시집(詩集)을 사는 책값으로 지출하던 그때를 생각한다. 내 즐거운 청춘(靑春)의 한 때, 내 이십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그때를 생각한다.   


[갯벌동인/김미숙] 

<갯벌> 동인을 말하다  / 김미숙(시인) 

마산은 내게 대망의 바다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삼천포를 떠나 꿈을 안고 도착한 마산은 그 꿈을 실현할 넓은 바다였다. 첫 직장도 마산이었고 대학 과정도 마산에서 마무리했다. 첫 직장은 YMCA에서 상담심리(지도교수: 윤태림 박사님, 배대균 원장님)를 이수한 경력으로 수출자유지역에서 젊은 종업원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상담사로 시작했다. 당시 수출자유지역은 마산은 물론 대한민국 경제의 일각을 책임지는 중요한 정부기획형 공단이었다. 외국회사를 비롯한 많은 회사들이 입주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의 꿈을 키우는 자양분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공부를 해야 할 나이에 직장생활을 하는 청소년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종일 일만하는 수출자유지역의 청춘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문화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했고, 그러다가 우선 내가 먼저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갯벌> 동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각 문학단체의 백일장에서 입상한 분들을 대상으로 관리사무소의 최창렬 수필가가 주선하여 황선하시인, 오미리 시인 등과 함께 갯벌동인을 출발시켰다. 당시 나는 아직 스무 살 갓 넘은 앳된 처녀에 불과했었다. 고등학교 문예부장을 지낸 덕분으로 평소 시공부를 좋아했기에 계속 위 선생님들과의 스터디를 통해 시를 공부했고 시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고 월초 정진업 시인, 고영조 시인도 우리와 함께 했고, 그렇게 <갯벌>은 하루가 다르게 70년대 문학의 산실이 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마산은 인근 도시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일하기 위해, 공부하기 위해, 더 나은 꿈을 이루기 위해 모여든 대망의 바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함안, 사천, 창녕, 남해, 산청 등등 마산 인근의 도시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마산 인구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마산에서 고등학교나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잡고 그들만의 꿈을 이루어갔다. 70년대 변변한 빌딩 하나 보이지 않던 마산은 이제 거대한 빌딩숲과 끝없는 아파트 단지로 변모했다. 한국전쟁의 피난 물결을 따라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마산으로 모여들었고, 뿌리를 내려 마산을 예술 중심 도시로 일구어 낸 것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1974년 창립한 <갯벌> 문학회는 1975년부터 뜻있는 기업의 후원금 등으로 동인지 발간 및 문학의 밤, 시화전 개최, 바자회 활동을 했고, 그 수익금으로 불우이웃을 돕는 일도 하였다. 그렇게 10여년이 흐르는 동안, 같이 활동했던 동인들은 직장 이동과 결혼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가끔 <갯벌>의 옛 동료들을 만나면 그때를 회상하기도 한다,
특히 가슴 아픈 일은 창립 2년째부터 우리의 멤버가 되어, 다니던 직장도 버린 채 문학활동만을 고집하던  ‘최명학 시인’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은 일이다. 그 이후 우리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된 일은 얼마 전 회장단이던 심용주, 김영신 씨를 만났고, 안 웅 시인은 현재 마산문협에서 함께 문단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회원이었던 이상화, 원지영, 박덕이, 이현숙, 한수연, 이순덕, 최경련, 구성화, 박찬희, 박문수, 정영숙, 홍정옥, 신순계, 박남희, 최옥희, 김정혜, 김재홍, 김상옥, 김장미, 김계희, 김용규, 신성민, 한정임, 박순옥, 김정수, 한수연, 김동순, 김상태, 여복순, 이정배, 추희숙, 정선자 등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문학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도 만나면 문학 이야기로 통금시간도 놓쳤고 비오는 해안도로를 걸으며 열변을 토했던 우리 <갯벌> 동인들이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건강하게 지내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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