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개설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를 기치로 일어난 민주주의혁명으로, 4·19의거 또는 4월혁명이라고도 한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에 동조한 시민들이 연합하여 전개되었으며 당시 창원·마산 지역의 경우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2차례에 걸친 의거를 통해 4·19혁명을 폭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역사적 배경
- 이승만 정권은 1954년 영구집권을 위한 ‘사사오입개헌’을 단행한 데 이어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자 국민, 야당, 언론 등 사회 전반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 실시된 제4대 민의원선거에서의 불법선거 자행과 더불어 국가보안법, 지방자치법 등을 개악(改惡)하여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는 법적 기초를 더욱 강화하였다.
- 이후에도 이러한 독재정치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선거는 전국적인 범위에서 광범위한 부정선거로 얼룩지게 되었다. 이에 마산·창원 지역민들의 불만이 대대적으로 폭발하였으며 전국적인 범위의 4·19혁명을 촉발시키기에 이르렀다.
발단
1960년 3월 15일에 시행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부정선거가 대대적으로 자행됨으로써 선거 당일에 이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창원·마산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이어 27일 이후인 4월 11일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눈에 맞아 숨진 김주열 열사의 시신 발견에 분개한 시민·학생들의 규탄시위가 다시 전개되면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 위한 전국적 규모의 시위운동이 촉발되기에 이르렀다.
경과
- 3·15부정선거에 대한 마산 지역의 시위에 대하여 이승만 정권은 4월 15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 19일에는 서울에서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으며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그날 서울에서만 자정까지 약 130명이 사망하였으며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지방에서도 부산·대구·광주·인천·목포·청주·마산 등과 같은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전국의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나 4월 19일 이후에도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으며, 일반 시민들도 적극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시위가 확대되자 4월 21일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이 물러났으나 시민들은 이승만의 퇴진까지 요구하였다.
- 4월 25일에는 300여 명의 대학교수들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의사를 밝힌 그날인 4월 26일부터 27일까지 창원·마산 지역의 학생과 시민들도 부산에서 원정 온 경남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청, 소방서, 경찰서, 파출소 등을 습격하면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과
4·19혁명의 결과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집권여당인 자유당이 몰락하였으며,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내각책임제 개헌에 의한 7·29총선으로 장면(張勉)을 국무총리로 한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출처]디지털창원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