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행사

사향 동인의 만남

등록일 :
2020-03-10 10:47:37
작성자 :
문화예술과(055-225-7193)
조회수 :
229

마산문학관 사향 동인

마산문학관 사향 동인

[사진 해설]

44회 특별기획전을 계기로 모처럼 사향 동인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지나간 시절들을 회고하면서 뜨거웠던 문학시절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명희 시인 : 창원문인협회 회장
-원은희 시인 : 가향문학회 회장
-김승강 시인 : 창원문학 편집장
-최봄(최미애) : 아동문학가

이 회고담은 원은희 시인의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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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향나무 가지마다 아린 꿈은 피고 있을까 / 원은희(시인)

사향가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십대를 건너 이십대가 되면서 우리는 젊음과 낭만과 호기롭던 꿈보다 울분과 분노와 절망으로 점철된 암울한 시기를 노래 불렀다. 사향문학의 밤, 사향인의 밤 등의 행사 때마다 결연한 의지를 다지듯 늘 사향가를 합창했다. 내가 글을 쓰고 윤병철 작곡가의 곡을 붙였다. 윤병철은 당시 작곡 공부를 하던 음악도였다. 『사향』2호에 사향가가 실려 있다. 
우리 동이들은 김지하 시집을 비롯한 금서들을 몰래 복사해 읽고 문학의 밤 자료집 작품들을 검열 받으며 문학판을 벌여놓고는 전위문학 운운하며 관객모독이라는 형식을 빌어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이렇듯 문학은 삶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절름발이거나 벙어리, 귀머거리가 된 채 무슨 일 좀 있어라, 있어라’ 주문을 걸 듯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1979년이었다. 
그날은 이학다방에서 모임이 있었다. 거금(내겐 큰 돈)을 들여 벼르고 벼르다 산 구두를 신고 나갔다가 몇몇 회원들과 데모대열에 합류했었다. 구호를 외치며 전진하다보니 어느새 앞줄에 서게 되었는데 최루탄이 터지고 경찰 진압이 시작되었다. 함께했던 여자 회원들과 경찰에 쫓겼다. 결국 부림시장 골목을 돌아 친구 최미애집에서 하룻밤을 구걸하기도 했다. 그날 나는 구두 한 짝을 잃었다. 다음날, 그런 딸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내 책들은 불살라졌다. 
그래도 그 시절 우리 곁엔 월초 정진업 선생이 계셨다. 새해엔 정종 한 병을 들고 문안 인사를 가기도 했었다. 사향이라는 동인 이름도 지어주셨고 창간호의 서문과 제집 제호와 서시 ‘향나무 숲속에 앉아’도 써주셨다.
이선관 시인과는 호형호제하며 격의 없이 지냈으며 우리의 행사에 늘 함께 해줬다. 창간호의 축시 ‘씨앗의 세계’를 써줬고 행사 때마다 시로써 우리를 격려해줬다. 우리가 불쑥 집에 찾아가면 집밥을 먹여주기도 했었다. 기름 동동 떠있던 맑은 닭발탕을 처음으로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행사와 출판물은 경찰의 검열과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자료집에 실을 작품들을 살펴보던 검열관이 이선관 시는 불손한 냄새가 난다며 브레이크를 걸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 부분을 고치기로 서약한 뒤 도장을 찍었다. 물론 돌아와서는 원문대로 발표했다. 아직도 그때 내가 찍었던 붉은 도장밥과 누런 검열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정시운 시조시인도 늘 우리들의 후원자가 돼주었다. 근무지인 고성군 회화중학교에도 자주 갔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선생은 문학을 위해 학교 서무실(행정실)장직을 버렸다. 대단한 결의가 느껴져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문학을 호구책으로 삼는 무모함이 내심 염려되기도 했었다. 어찌되었건 선생이 운영했던 카페 ‘날개’에도 들락거렸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선생은 날개를 날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는데 지금도 소식을 알 바 없다.  
내가 문학의 길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은 고교시절 때부터다. 입학하자마자 백일장이 열렸는데 멋모르고 써낸 시가 입상을 하게 되어 문예반 활동을 하기 되었다. 당시 학교에는 박평주 시조시인이 계셨다. 수업을 받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시조문학』을 구독해서 보라고 권유했고, 자연스럽게 당대의 시조와 접하게 되었다. 나를 시조의 길로 이끌어준 셈이다. 
문예반 회원 몇몇은 백일장이 있는 곳마다 학교를 대표하여 나갔다.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되고 낯선 풍경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수상의 기회들도 따라주었고 다른 학교 백일장 참가자들과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졸업 후, 사향동인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동인들은 문학기행도 자주 다녔다. 을숙도의 갈대밭은 우리들의 키를 훌쩍 넘어 갈대 사잇길로 들어서면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갈대밭에 드러누워 불 지르고 싶다던 설주환은 작품발표는 하지 않고 우리들의 난상토론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고만 했었다.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2대 회장을 맡아 동인지 <사향> 3호를 출간하였다. 회원은 8명이었으나 작품을 실은 회원은 김승강, 박동점, 우무석, 원은희, 유영국, 한영욱, 최미애 등이다.
문학이라는 카테고리로 만나 공부하고 서로 작품을 나눠읽으며 동인으로서의 연대를 형성하게 해주었던 ‘이학다방’은 사향동인의 아지트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 문학을 통한 연대감을 키워갔었다. 당시에는 문학, 연극, 음악을 하는 젊은이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었다. 이제는 성악가로, 지휘자로, 연극인으로 자신을 우뚝 세운 모습으로 가끔 만날 기회가 있으니 세월은 그냥 비켜가지만은 않은 듯하다.
79년 암울했던 와중에 나는 MBC대학가요제에 참가할 곡의 작사 청탁을 받았었다. 당시 어울렸던 경남대학교 음대생이었던 남기제의 요청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리하여 <고운님>이라는 곡이 경남대학 음대생으로 구성된 ‘뮤지케’에 의해 전국으로 중계되었다. 경남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은상이었다. 그날은 홍수로 마산이 온통 물난리를 겪었다. 집들이 잠기고 가축들이 둥둥 떠내려가고 도심이 아수라장이 된 날이었다. 그때 받은 상금은 수해의연금으로 모두 기탁했다.
사향동인회 회장을 맡았지만 군 입대와 삶의 진로 등의 고민을 안고 각각 흩어졌다. 그 뒤 사향의 부재를 잊기라도 하듯 결혼을 했지만 늘 사향을 끌어안지 못한 부채감이 아직 남아있다. 강현덕은 시조계에 큰 족적을 남기며 왕성한 활동 중이고, 최미애는 아동문학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잘 펼치며 끝없이 창작에 매진하고 있으며, 조영안은 수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일근은 한국 시단에 입지적 위치를 점하고 있고, 김승강은 꾸준히 시집을 내며 문단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김숙영은 울산서 방송작가로 활약하다 찻집을 운영하느라 문단에서 볼 수는 없다. 한영욱과 이재업 또한 문단에서 소식을 접할 수 없어 아쉽다. 뒤이어 들어왔던 박동점 또한 문학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 같다.
내 이십대는 사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니 글의 향기를 쫓아 사향동인들과 함께 내달았던 날들이 봄날이었다. 40년의 세월이 지난 나의 육십대는 어떨까? 멈칫 가슴을 쓸어내리자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사향나무 가지마다 피우고자 했던 아린 꿈은 잘 영글어가고 있긴 한 건지. 내가 세우고자 했던 세계질서는 제대로 완성되고 있는지 등등.  

□ 원은희

- 마산무학여자고등학교(구 마산여상) 졸업
- 방송통신대학교 졸업
- 창원대학교 대학원 졸업

- 시집 『마스가제호에서의 하루』
- 평론집 『서벌 시조 연구』

- 1992년 시와비평 신인상 수상
-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 1996년 남명문학상 신인상 수상
- 2003년 경남문학 우수작품집상 수상
-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 회장 역임, 경남지역문학회 회장 역임
   권환문학제전위원장 역임, 
   현재 가향문학회 회장, 권환기념사업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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