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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허당 명도석 선생 친필 한시 영인본 및 번역본

등록일 :
2019-09-11 02:04:27
작성자 :
문화예술과(055-225-7193)
조회수 :
618

허당 명도석 선생 한시

허당 명도석 선생 한시

[사진 해설]

허당 명도석(明道奭)(1885~1954) 선생님은 우리 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중의 한 분입니다.
명도석 선생님의 손자 명유진 님이 2019년 9월 10일(화), 추석을 앞두고  마산문학관에 한시 영인본을 기증하셨습니다. 
이 한시는 명도석 선생님이 남긴 3편의 한시입니다. 
기존에 번역된 글이 있지만,  올해 새로 시인이자 문학박사인 김복근 선생이 하셨습니다. (*첨부 파일에 번역본 있음)

[虛堂 明道奭 先生 詩]

1. 四月 淸和                    청화한 4월

陰陰海瘴夜來晴 음음해장야래청  음습한 바다 기운 밤 도와 물러가고
日麗風和適此行 일려풍화적차행  바람 그쳐 맑은 날, 길 떠나기 좋아라
烈士心魂山岳重 열사심혼산악중  절의 지킨 선비 마음 산처럼 무거운데
浮生踪跡羽毛輕 부생종적우모경  덧없는 삶의 자취 깃털처럼 가볍구나
三春花木經飛燕 삼춘화목경비연  춘삼월 꽃나무에는 제비가 날아들고
四月林泉聽樂鶯 사월임천청락앵  사월 숲 샘터에는 꾀꼬리 소리 즐거웁다
菲薄殘差何足說 비박잔차하족설  보잘 것 없이 사는 부끄러움 어찌 말로 다하랴
狂歌亂舞是吾情 광가난무시오정  미친듯 노래하고 어지러이 춤추는 내 마음이여



2. 秋日 登山                 가을날, 산에 올라 

山嶽縈回闢海門 산악영회벽해문  빼어난 산 굽이돌아 바다 문을 열어놓고
楓林遙處有漁村 풍림요처유어촌  단풍나무 숲 저 멀리 어촌이 있다네.
良朋相握杯盤好 양붕상악배반호  어진 벗과 주안상 마주 하니 좋구나
鸞舌高噪市街昏 란설고조시가혼  새들은 높이 지저귀고 마을에는 어둠 내리네. 
大野登豊懷古跡 대야등풍회고적  풍년 든 넓은 들녘 옛 일을 돌아보니
殊鄕未返幾人魂 수향미반기인혼  타향을 떠도는 사람의 넋은 그 얼마인가.
蕭蕭鬢髮寒聲近 소소빈발한성근  소소한 귀밑머리 찬바람 가까우니
宋玉悲秋今古論 송옥비추금고론  송옥의 슬픈 가을은 오늘까지 전해오네.

3. 秋登騶山                   가을, 추산에 올라

蕭灑西風晩上山 소쇄서풍만산상  하늬바람 소슬하여 저물녘 산에 올라
颼颼鬢髮夕陽間 수수빈발석양간  머릿결 휘날리며 지는 해를 바라보네.
樽酒居然今我醉 준주거연금아취  거연히 술을 드니 나는 오늘 취하고 
虫言無事這邊閒 훼언무사저변한  일없는 벌레 소리 사방이 한가하네.
村聲逈出漁樵市 촌성형출어초시  멀리 마을 소리, 고기와 나무 파는 저자에서 들려오고
零葉高飛水石顔 영엽고비수석안  나뭇잎 높이 날아 물 속 돌이 얼비치네.
旱雨秋功全未熟 한우추공전미숙  가을비 오지 않아 온전히 익지 않았는데
田園寂寞野人還 전원적막야인환  적막한 시골 마을, 일 마친 사람 돌아오네.


명도석 선생님의 생에에 대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명도석(明道奭)[1885~1954]은 어시장 객주 출신으로 1907년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후진의 양성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옥기환, 구성전 등과 함께 마산 노동 야학을 운영하여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힘썼다. 학교생활을 계기로 김철두·이형재·김용환·김명규·김종신·팽삼진 등과 같은 뜻 있는 젊은이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고, 마산의 민족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3월 10일 추산공원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1920년 가을에는 미국에서 항일 활동을 전개하던 박용만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의 안동에서 만나 항일 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기도 하였다.

1927년 7월 20일에 신간회 마산 지회의 설립 대회에서 서기홍과 함께 정치 문화 부장을 담당하였다. 1928년 12월 28일에 열린 제2회 정기 대회에서는 회장직을 맡았다. 광복 이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마산 지부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명도석은 경영자이기도 했지만 노동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양조장을 경영하고 또 옥기환 등과 함께 원동 무역 주식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노동 운동에도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마산의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신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양조업에서 운송업으로 사업을 전환한 이후 자신이 운영하던 운송 회사의 수송 차량을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단체에 은밀히 독립 자금을 지원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옥기환 등과 함께 자력갱생을 위한 터전으로 만든 원동 무역 주식회사를 바탕으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부산의 백산 안희제와도 연락하면서 독립 자금의 공급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 몽양 여운형이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하자, 경남 조직책을 맡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인연으로 8·15 해방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의 마산시 위원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좌우 대립이 심화되자 일체 공직에 나서지 않고 은거하다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당한 후 후유증으로 죽은 것으로 전한다.

[묘소]
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신기리 죽전 마을 뒷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2005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2006년 ‘명도석 선생 생가 터’ 표지석이 설치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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