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자료

부마민주항쟁

등록일
2019-07-03 05:01:06
조회수 :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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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8일 마산을 뒤덮은 그 날의 함성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외침!
유신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앞당긴 우리 지역의 자랑스러운 역사
부마민주항쟁! 그 날을 잊지않고 기억합니다.!

<b>(자막)부마민주항쟁 38주년! 부마민주항쟁</b>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 대한민국 그 중심에는 국내 최대의 기계공업도시로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창원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창원시가 이끌어 온 것은 비단 경제성장만이 아니었다.
자유대한민국을 만든 민주화의 물결속에 3·15의거와 10·18부마민주항쟁까지
창원시의 역할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b>(자막)1979년 10월 16일 부산</b>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산대학생 4,000여명이 시위를 시작했고 이는 삽시간에 부산시민으로 번져나갔다.
이 소식이 마산으로 전해지면서 10월 18일 경남대 도서관에는 견문이 나붙었고, 학생 500여명은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강의실 밖으로 나섰다.
그날 오후 5시 마산시내에 위치한 3·15의거 기념탑 앞에는 학생과 시민 2,000여명이 모였고 민주영령에 대한 묵념으로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10,000여명을 넘어섰고 시민들은 경찰서, 시청, 법원등을 습격하며 분노를 드러냈다.
다음날인 10월 19일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하면서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독재체제에 대한 분노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열망은 그 누구도 막을수 없었다. 갈수록 거세지는 시위에 정부는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고, 정부기관과 언론기관, 각 대학교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무력진압과 언론통제로 부마민주항쟁은 이대로 막을 내리는 듯 했지만 그 불씨는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학생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고,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태로 사망하면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것이다.

<b>(자막)김재규 정보부장에 피격, 사망 (1979년 10월 26일)</b>

1979년 10월 닷새 동안 이어진 민중들의 시위는 오랜 유신체제를 흔들었고,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이렇게 부마민주항쟁은 민주주의의 꽃을 피운 분수령으로서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평가와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다행히 38년이 지난 지금 여야정치권은 한 목소리로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개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창원시는 10월 18일을 부마항쟁 창원기념일로 지정하는 조례를 지난 2월에 통과시켰다.
부마민주항쟁의 진상규명과 역사적 평가를 높이기 위한 창원시와 기념사업회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10월 18일 지금의 창원에서 시민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그날이 그 정신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계승으로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다시금 세워나가야할 때입니다.

<b>(자막)3·15의거 발원지, 3·15의거 기념탑, 3·15의거 기념비, 4·19혁명 진원지, 6월민주항쟁 30주년기념, 강융기 열사 추도비, 김영호 열사 추도비,김용실·김영준 열사 추념비, 김주열 열사 흉상, 김주열 시신 인양지,국립 3·15민주묘지, 무학초교 총격담장, 부마민주항쟁상징조형물,부마민주항쟁시원석</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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